![]() ![]() 한홍구 지음/한겨레출판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역사이야기’를 연재하는 등 딱딱해지기 쉬운 역사를 오늘날 사회에 빗대,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가고 있습니다. 2003년 나은 ‘대한민국史(사)(한겨레출판 펴냄)’도 같은 맥락이겠죠?
제가 소개할 1권의 부제 –단군에서 김두한까지-는 근현대를 관통하며 우리사회의 문제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앞서 2003년 기준이기 때문에 오늘날과 내용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 p5 머리말 ‘역사를 보는 자신의 눈을’에서
1부 승리의 짜릿한 감격은 없었다 우리나라는 전제군주제에서 바로 공화제로 넘어왔습니다. 바로 입헌군주제나 흔한 민주혁명을 직접 해보지 못했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는 등 비정상적인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 책은 그 외에도 임시정부를 제대로 계승했는지, 태극기의 비밀, 단일민족의 허상, 김두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휘둘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지적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 피동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해방과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해 우리는 참으로 끈질기게 주체적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불행히 승리하지 못한 것이다. 단 한번 승리, 어떤 민중가요가 노래하는 그 단 한번 승리의 짜릿한 감격을 아직 맛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략)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다음 시대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8~19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 유산된 민주혁명’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공화제가 채택되어 우리 역사에서 형태상의 군주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지만, 지난 50년간의 ‘민주공화제’ 실험에도 ‘군주제’가 내용적으로 극복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 p36 ‘왕정은 왜 왕따당했나 – 입헌군주제 논의와 공화제의 도입’에서
친일잔재의 청산이나 분단극복 문제 등에 대한 임시정부의 핵심적인 정책들 역시 대한민국에서 계승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로부터 인물의 계승은 물론이고, 정책의 계승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권을 비롯해서 역대 정권은 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였을까? 이들 정권은 자기네가 결여한 정통성을 임시정부의 업적과 권위를 빌려다가 메워보려 한 것이다. - p47 ‘대한민국의 법통을 말한다 – 다시 생각하는 임시정부의 정통성 계승론’에서
우리는 단일민족의 허상, 혈통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 재외동포에 관한 법률을 보면 단일민족을 따지는 기준이 꼭 “단군 할아버지” 자손은 아닌 것 같다. 이 법은 재외동포의 정의를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자 및 그들의 자손으로 규정하는 절묘한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민을 떠난 재중동포나 옛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재외동포에서 배제시켜 버렸다. (중략) 명백히 한민족의 구성원인 중국이나 옛 소련 지역의 동포들이 이런 대접을 받는 단일민족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 p69~70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인가 – 단일민족 신화의 허상’에서
2부 우리는 무덤 위에 서있다 동의하고 싶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나라는 일제잔재, 군사독재, 민간인 학살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모태는 만주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고, 민주화 이전 고문 전문가는 거의 친일파였으며, 우리나라 정부와 국군은 6·25 전쟁을 전후해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2부의 제목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군요.
이북에 끼친 만주의 영향이 일제와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에 대한 저항 속에서 배태된 것이라면, 이남에 끼친 만주의 영향은 바로 만주국에서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인맥이 얻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남에서 만주인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역시 군부였다. - p95 ‘만주국의 그림자 – 대한민국의 교과서?’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친일파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다. 친일파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크게 기여한 분의 글을 잠시 보자. “친일파 문제는 한국사회의 원죄이다.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한국사회가 발전할 수도 없고 존재하기도 어려운 그런 난제이다. 민족분단의 문제가 여기서 비롯되었고 경제종속의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군사독재가 친일파의 사생아이고 사회혼란이 그 결과물이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문제이건 친일파와 관련이 없는 것은 없다.… 실로 오늘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는 모두가 친일파가 저지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잘못 끼운 첫 단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친일파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친일파만 제대로 청산하였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인가? - p104 ‘‘친일파’에 관한 명상 – 일제잔재 청산의 몇 가지 편향에 관하여’에서
3부 또 다른 생존방식, ‘편가르기’ 우리는 ‘보수냐 진보냐’ 혹은 ‘넌 어느 지역에 사냐(어느 지역에서 왔냐)’ 등으로 ‘편가르기’에 익숙해져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수틀린 행동만 해도 ‘수꼴’, ‘좌빨’이라는 낙인을 찍기도 하죠. 한때 연좌제도 서슴지 않았고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일부 부유층은 오히려 훨씬 살기 좋아졌다면서 “이대로!”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냉전과 민족대립을 넘어 화해로 가는 마당에 이들은 또 “이대로!”를 외치며 길을 막는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지, 보수주의자들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 p152~153 ‘‘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 ‘똥과 된장’만큼 다른 수구와 보수의 차이’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70살 이상의 인구는 전체의 4%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70살이라고 해봐야 해방 당시의 열 네 살이니, 분단과 전쟁의 당사자라 할 만한 나이는 아니다. 남쪽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시대가 아닌 것처럼 이북 역시 김일성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미 분단은 2세 또는 3세들의 대결로 넘어간 지 오래이다. 분단이 2세 또는 3세들의 대결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세나 3세들은 부모 세대의 선택이나 운명에 의해 남이나 북의 어느 한 쪽에 살게 되었거나 태어나보니 남쪽이나 북쪽인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 p158~159 ‘누가 ‘좌우대립’이라 부추기는가 – 만경대 방명록 소동’에서
4부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 ‘반미’.. 2002~2003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단어였습니다. 2002년 쇼트트랙 금메달을 어이없게 빼앗겼고, 월드컵 기간 중 미군 장갑차 압사 사건을 겪으면서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구었죠. 2008년 광우병 파동으로 인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에 ‘반미’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장은 미국과 동맹국인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왜 ‘반미’를 외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국내의 명사들이 대대적으로 반미성전에 앞장섰다면,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상류층들은 집단적으로 몹쓸 병에 걸려버렸다. 어떤 의사들으 s이 병을 후천성 반미결핍증이라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이 병이 후천성이 아니라 선천성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한때 반미의 열렬한 선구자(?)였던 점을 본다면 후천성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의 자식들이 수직감염되는 사례가 빈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후천성이던 이 병이 선천성 유전병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한번 이 병에 걸리면 여간해서는 고쳐지지 않고, 반미의 ‘반’ 자만 보아도 화들짝 놀라고 흥분해서 날뛰게 된다. - p242 ‘반미의 원조는 친일파였다 – 후천성 반미결핍증의 웃기는 역사’에서
아직까지 미군보고 당장 나가라고 사는 사람은 그 엄청난 촛불의 바다에서도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 따위로 하려면 나가라’는 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어 보였다. “어머님, 아버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습니다”를 외칠 때 우리는 서로 반미나 미국 반대냐를 다지지 않았다. 호들갑을 떠는 수구세력에 하나가 되어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모두 외치는 듯했다. - p254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 - 광화문 촛불시위 거리에서 느끼는 감격’에서
5부 병영국가 대한민국 우리나라 국민 중 남자들은 대부분 병역의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병역비리는 만연했죠. 그리고 병역이 주는 부정적인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있지요.
이 땅에서 징병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민족이 지배하였던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시기였다. 일제는 1938년 2월 22일 ‘육군특별지원병령’을 발표하여 조선인이 일본군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중략) 일제가 지원병제도를 도입한 것은 병력자원의 부족을 메우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조선청년들을 ‘황군’에 복무케 함으로써 황국의식을 주입하려는 것이 주된 의도였다. - p265 ‘찬란한 ‘병영국가’의 탄생 - ‘신성한 국방의무’는 어떻게 시작되고 유지되었나’에서
제도가 바로 서지 못할 때 합법적인 병역면제나 병역연기와 불법적인 병역기피의 차이는 불분명해진다. 한국전쟁 기간 중 군대에 가는 것은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고, 또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널리 알려지면서 군에 가서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고 얼어죽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병역기피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 당시 병역기피의 주된 통로는 대학에 들어가 징집연기를 받는 것이었다. - p303 ‘상아탑은 병역비리탑? - 병역기피의 사회사2’에서
이 책만으로 우리나라 사회가 왜 이 모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역사를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죠. 저도 약간 어려웠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간간이 보이는 의견은 어느 정도 참고할 만하지요.
이참에 4권까지 읽어볼까 생각이 드는 군요. 한홍구 교수가 지은 ‘대한민국史(사)’,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
- 2015/02/14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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