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주말에 있었던 불꽃 축제를 앞두고 준비하다 물에 빠져 하늘나라로 가버린 어느 비정규직에 대한 영상리포트 '화려한 불꽃축제에 가려진 죽음'(국민TV, 2015.10.5.)을 보며 우리의 현실을 떠올렸다. 그 영상의 끝부분은 미래를 위해 화려하게 빛내야 하는 우리를 이렇게 정리했다.
'누군가의 불꽃이었을…'
우리 젊은 세대가 '헬조선'이라 자조하며 부르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이런 희생은 흔한 일상이다. 100% 노력만으로 모자라, 200, 300% 노력해야 겨우 하루 목표를 이루었다 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렇지 못하면 도태되고, 정작 해내도 법과 자연의 순리에 배제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들의 노력은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없다. 길게 늘려 '노오력'이다. 그럼에도 혜택은 짜도 너무 짰다. '열정'으로 때우라는 말인 '열정페이'로 통하니, 이정도 '노오력'도 어림없었다. 어쩌면 '노오력'은 힘쓸 로와 힘 력 사이에 넘침을 뜻하는 영어단어 Over의 앞 글자(한글 발음 표기)를 딴 게 아닐까?
엄기호 문화학자는 '노오력'이 제시하는 선택을 '삶에 대한 기만이고 노력에 대한 배신'이라 말했다.('[세상읽기]노오력, 노력의 배신자', 경향신문, 2015.9.21.) 일을 제대로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갇힌 덫을 스스로 뺄 수 있을까? 누군가 빼주길 기다리며 참고 자조하거나 냉소를 띄지 않을까?
여전히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자기 합리화가 먹혀드는 세상이다. '열정에는 아픔이 따른다. 눈앞에 당장 보이는 달콤함을 미래의 꿈을 위해 포기해야 온다'(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29쪽)고 말하는 사람들, 여전히 '노력해야 잘 산다'는 구닥다리 논리로 우리를 가르치려 든다.
나는 노력 자체를 폄하하고 싶지 않다. 왜 '노력'이 아닌 '노오력'으로 보이지 않는 지옥을 살아야 하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언제까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짓밟으며 하는 노력'이 문제를 풀어줄거라 기대하며 어려움을 자기 탓으로 돌려야 할까? '태어날 때부터 죄인', '전생의 업보'라 생각하며 자포자기해야 할까?
도전하고 열정을 쏟는 건 이럴 때 쓰는 게 아니다. 서로 힘, 의견, 지혜, 마음을 모으며 일을 해내는 게 더 생산적이고 열정적이지 않을까?
그럼 지금 삶에 길들여진 우리는 저렇게 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선뜻 망설여진다. 쉬워 보이지만 실천하기 힘든 저 답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노오력'으로 가득찬 지옥에서 예전처럼 살아갈 것인가? 모든 건 우리 손에 달렸다,
끝으로 '노오력'에 아파해야 청춘이라는 사람들에게 유병재 작가가 남긴 한 마디를 날리겠다. 그깟 '노오력'은 당신이나 하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아프니까 환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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